"아빠 손 잡고 왔었는데"...50년째 켜진 필름 현상소 [핑거이슈]

    작성 : 2026-11-08 08:00:01 수정 : 2026-11-08 09:05:33

    "찍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디지털 사진이 일상이 된 세상.

    그 반대편에서, 한 컷 한 컷을 아끼며 필름 한 통을 정성껏 현상해 주는 곳이 있다.

    ▲전남광주특별시 양동에 위치한 필름현상소

    1977년 8월 5일 문을 연 이래 반세기 가까이 이 자리를 지켜온 현상소의 주인, 올해 일흔여덟의 박승수 사장님이다.

    아날로그 장비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지금, 이 일을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현상소는 그 자체로 귀한 존재다.

    그 긴 시간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 흑백에서 컬러까지, 50년 이어온 '인생 컷'의 역사

    ▲50년째 필름현상소를 운영중인 박승수 사장님

    ▶ 인터뷰: 박승수 / 양동 컬러현상소 사장
    "77년 8월 5일부로 가게 오픈을 했고, 시작할 때는 흑백 현상소로 시작을 했었어."

    금호타이어 전신인 삼양타이어에서 일하며 사진을 접했던 그는 갖고 있던 장비를 보강해 흑백 현상소 문을 열었다.

    낮에는 손님을 맞고, 밤에는 새벽까지 작업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80년대, 세상이 달라졌다.

    공무원에게도 보너스가 생기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넉넉해지고, 컬러 사진이 큰 붐을 탔다.

    형편상 곧바로 따라가진 못했지만, 1990년 마침내 컬러 현상기를 들였다.

    ▶ 인터뷰: 박승수 사장
    "그때만 해도 일이 많아서 여직원 셋 데리고 나하고 네 사람이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풀가동했었죠."

    직원 셋과 사장님까지 네 사람이 하루 열두 시간을 꼬박 매달렸을 만큼, 가게는 호황이었다.

    그 시절 카메라는 부의 상징이었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있어 보이던'때.

    그러나 정작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장님은 필름을 받을 때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가르쳤던 손님의 아이들이 자라 이제는 자기 아이 손을 잡고 가게 문을 연다.

    ▶ 인터뷰: 박승수 사장
    "그때 엄마 아빠 손잡고 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거꾸로 자기 아빠가 했던 식으로 자기 자녀들 데리고 올 정도로 돼 있어요."

    이제는 얼굴이 가물가물해도, 아버지 손을 잡고 왔던 가게를 기억해 찾아와 주는 손님들.
    사장님은 그 발걸음이 반갑고 자랑스럽다고 한다.

    ▲필름을 현상기에 돌리는 모습

    ◇ 50년을 버텨온 힘, 필름만큼 쌓아 올린 신뢰
    다른 곳은 하나둘 문을 닫는 동안, 이곳은 어떻게 50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 인터뷰: 박승수 사장
    "꾸준함을 지킨다는 거죠. 너무 이익에만 만족하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명품을 만든다는 그런 다짐으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맡겨 놓고 찾아가지 않는 필름이 10년을 모아도 마대 절반이 안 될 만큼, 손님과의 신뢰도 차곡차곡 쌓였다.

    이익보다 자부심, 그리고 신뢰. 50년을 지탱해 온 힘이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 위로, 이제는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온다.

    요즘 가게를 찾는 손님은 10대에서 30대의 젊은 층이다.

    일회용 카메라가 60% 이상, 부모님이 보관하던 카메라를 들고 오는 이들도 있다.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던 부모님의 카메라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인화된 사진

    ◇ 아끼던 세대와 즐기는 세대, 잔소리 대신 얹는 너그러움
    한 컷이 아까웠던 세대와, 마음에 안 들면 지우면 그만인 세대.

    사장님의 눈에 요즘 손님들은 예전과 어떻게 다를까.

    ▶ 인터뷰: 박승수 사장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죠. 솔직히 말해서 진지함이 덜해. 우리가 배웠을 때는 한 컷 한 컷이 좀 아까웠지."

    필름 한 컷이 아깝던 시절을 살아온 사장님에게, 요즘 세대의 방식은 낯설 수밖에 없다.

    ▶ 인터뷰: 박승수 사장
    "근데 요즘은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핸드폰으로 그냥 찍고 마음에 안 들면 지워버리고, 그런 버릇으로 필름도 찍는 경향이 있지."

    그래서 처음에는 손님들에게 따끔하게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이 지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 인터뷰: 박승수 사장
    "처음에는 이 사람들한테 호되게 뭐라고도 했어. 근데 내가 느낀 것은 '아, 요즘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는 이게 아닌데 내가 싫은 소리를 했구나'하고. 요즘은 묻지 않으면 거의 얘기를 안 해요."

    이유는 단순하다.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사장님은 이를 세대의 차이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로 받아들인다.

    ▶ 인터뷰: 박승수 사장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어 있다고 봐야 돼.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끼는 버릇으로 살아왔는데, 요즘 세대는 돈에 대한 관념보다는 하고 싶은 거 한다는 걸 확실히 느끼고 있죠."

    아끼며 살아온 세대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세대.

    서로 다른 두 세대가 필름 한 통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다.

    묻지 않으면 말을 아끼는 것, 세월이 만들어준 너그러움이다.

    ▲인화작업 중인 사장님

    ◇ 건강과 기계가 허락할 때까지, 조용히 미루는 마침표
    세대가 바뀌어도 필름을 찾는 발길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계는 점점 수명을 다해간다.

    아날로그 장비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 기계가 고장 나면 부품을 구하기 어렵다.

    수리 기사 몇 명에게 보험처럼 비용을 내며 버티고 있다.

    또 후계자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 인터뷰 : 박승수 사장
    "취미로 하는 것은 몰라도 이걸 생활로 직업으로 삼기는 어려운 시대가 됐잖아요. 그래서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도 사장님은 오늘도 현상기 앞에 선다.

    ▶ 인터뷰 : 박승수 사장
    "내가 건강이 허락하면 기계가 끝날 때까지는 해야지. 내 의지보다도 기계가 언제까지 버텨주냐가 문제지"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에, 기다림의 시간을 지켜온 사람. 그의 현상소에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한 컷이 조용히 깨어난다.


    (기획·촬영 : 전준상 / 구성·편집 : 국단오 / 취재 : 김서희 / 제작 : KBC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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