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이슈]"입양, 한 아이의 세상을 바꾸는 일"..공개 입양 1세대 부부의 가족 이야기

    작성 : 2025-05-11 08:00:02

    "입양은 한 아이의 세상을 바꾸는 거래요."

    20년 넘게 두 명의 입양 딸을 키워낸 66살 고경석 씨와 63살 엄진경 씨 부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정을 만든다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는 선택은 부부에게 단순한 '좋은 일' 이상이었습니다.

    ▲ '공개 입양 1세대' 고경석·엄진경 씨 부부

    '공개 입양 1세대'인 고경석·엄진경 씨 부부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를 조금씩 넓혀온 산증인입니다.

    입양의 시작은 우연한 봉사활동에서 비롯됐습니다.

    엄진경 씨는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중 문득 든 생각을 남편과 나눴다고 말합니다.

    "자원봉사 하는 것도 좋지만 한 아이를 입양하면 어떨까 딸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요. 이제 아기 아빠랑 이야기가 되어졌는데 아이가 하나 더 오면 네가 고생인데 어떻게 하겠냐, 나는 상관없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저희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번 또 찾아갔어요."

    아이를 처음 보러 간 날, 남편이 아이를 안자 울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이를 지켜본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생긴 것도 그냥 우리집 식구같이 생겼다."

    그 말 한마디가 입양을 결정짓는 순간이었습니다.

    ▲ 입양 당시 첫째 딸 예란 씨의 모습 

    "입양을 하자. 그래서 바로 이제 신청을 하고 서류를 떼서 열심히 일주일 동안 서류를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고 날 잡았죠."

    그렇게 입양된 첫딸 '예란이'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부부의 두 아들은 여동생을 맞이하며 무척이나 들떴다고 합니다.

    "밖에서 공 차고 막 놀 그런 시기인데 일찍 들어와서 동생 본다고 우리 집에 여동생이 생겼다고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하지만 막상 예란이는 조용한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말괄량이로 아주 소문났던 친구고 오빠들이랑 같이 공 차고, 농구하고, 태권도 따라다니고 하다 보니까 성격 자체가 좀 왈가닥 같은 그런 성격이어서.."

    그 모습에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녹아든 가족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 어릴 적 오빠와 손을 잡고 뛰놀던 예란 씨의 모습  

    부부는 처음부터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키울 건 아니고..우리 아이들 키우듯이 그래 집에 와서 같이 먹고 자고 학교 보내고 그 정도 해주는 게 차라리 시설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나 생각했죠."

    공개 입양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입양을 해도 외부에 알리길 꺼려하던 가정이 대부분이었지만, 부부는 입양 사실을 감추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 예란, 예빈 씨의 아버지 고경석 씨 

    "이 아이에게 굳이 우리가 숨기면서까지 살아갈 필요가 있겠냐 했어요. 그때 우리를 입양으로 인도했던 대한사회복지회 원장님도 그런 마인드였고 그 말에 대해서 동의를 해서 우리도 그래 오픈하자 하고 이제 뜻을 모았죠."

    이후 부부는 광주·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입양 가족 모임'을 만들고, 정기적인 교류를 하면서 입양 홍보와 인식 개선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부부의 결정으로 입양된 딸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정체성'이라는 질문은 점점 더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큰딸 예란이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생모에 대한 궁금증을 강하게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을 던지다가도, 반복되는 물음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차만 타면 엄마 그거 있잖아. 나 낳아준 엄마라는 사람 어떻게 생겼어? 잘 살아? 어디서 살아? 부자야? 이렇게 묻더라고요."

    ▲ 예란, 예빈 씨의 어머니 엄진경 씨  

    부모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아이의 물음이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당연한 권리임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수소문 끝에 돌아오는 어버이날.

    마침내 큰딸과 생모의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딸은 정성껏 만든 카네이션을 준비하며 설렘과 긴장 속에서 생모를 만났습니다.

    만남은 예상보다 담담했다고 합니다.

    딸은 마치 이웃집 아주머니를 대하듯 생모를 바라보았고, 오래 품어온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 예란이는 엄진경 씨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엄마. 그래도 내 엄마랑 아빠는 엄진경, 고경석이야."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부모의 수많은 걱정과 망설임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동안의 양육이 결코 허상이 아니었음을, 아이 역시 가슴 깊이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입양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부부는 현실적인 조언과 따뜻한 응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입양은 단순히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품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양은 가족이 되는 방법 중에 하나잖아요. 그게 가족이라는 게 있으면 그 울타리라는 게 얼마나 크고 높은 성인가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는 안전하게 자라고, 그 안에서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하지만 이 따뜻한 말 뒤에는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뼈 있는 조언도 함께였습니다.

    ▲ 공개 입양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고경석·엄진경 부부

    "우리가 해보니까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냥 나는 이제 아기 하나 데리고 오면 되지 이 생각을 하고 입양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그거는 아니라는 거죠. 와서 키워보니까 만만치 않아요." 

    25년 전과 비교하면, 입양에 대한 인식은 완화됐지만 절차는 훨씬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고경석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합니다.

    "우리가 큰애 둘째 애를 입양을 할 때는 거의 이 아이 데리고 가겠다 그러면은 바로 그날 짐 싸가지고 저희들이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은 준비해 놓을 테니까 내일 오세요 해가지고 바로 데려오고.. 지금은 거의 1년, 길 때는 1년 반 걸린다 들었죠."

    엄진경 씨도 덧붙였습니다.

    "서류도 많고 한 20가지 되더라고요. 정신적인 부분도 다 상담해서 그런 것까지 내야 되고 하니까..마약을 했는지 중독이 있는지 이런 것까지 다 해서."

    최근 들어서는 입양을 위한 서류, 정신적 안정성 검토, 자격 요건 심사 등이 대폭 강화되면서 적잖은 예비 부모들이 조건에 미달해 입양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사랑하면서 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이 키우는 거지 돈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입양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뭐 계산기만 두드려 갖고는 답이 안 나오는 것이고.. 일단 시작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죠."

    조건이 완벽해서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고 키우겠다는 결심이 있을 때 입양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 이 부부의 일관된 신념입니다.

    ▲ 고경석·엄진경 씨 가정의 모습 

    부부는 입양을 너무 이상화하지 말고, 현실로 받아들이며 결단하라는 조언도 덧붙였습니다.

    "입양은 '계산기로 풀리지 않는다'. 시작이 중요해요."

    "입양을 너무 가볍게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너무 또 신중하게 생각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입양이라는 이름 아래, 이 부부는 두려움도, 편견도, 책임도 사랑으로 품어냈습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부부가 보여준 건 단순한 양육이 아닌, 한 아이의 삶을 온전히 바꾸는 작지만 깊은 기적이었습니다.

    (기획·촬영 : 전준상 / 구성·내레이션 : 신민지 / 편집 : 문세은 / 제작 : KBC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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