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죄 없이 떠난 정호용…"5·18 진실 규명 더 절실"

    작성 : 2026-09-14 08:59:38
    신군부 핵심 세력 5명 모두 사망…5·18 책임 끝내 외면
    "최초·집단발포 명령자와 비공식 지휘체계 진상 밝혀야"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1996년 1월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 [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시민을 유혈 진압한 정호용이 끝내 사죄하지 않고 사망했습니다.

    정호용을 포함한 신군부 핵심 세력 5명이 참회와 진실 규명 없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최초·집단발포 명령자와 비공식 지휘체계, 암매장 등 5·18의 남은 진상을 끝까지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습니다.

    14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지난 13일 정호용은 향년 94세로 사망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 인물이었던 정호용은 12·12 군사반란 직후 특전사령관에 올랐고,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3·7·11공수여단을 사실상 지휘했습니다.

    정호용은 12·12와 5·18 관련 혐의(내란목적살인 등)로 재판에 넘겨져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습니다.

    특히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이 최후 항전을 벌인 전남도청의 재진입작전의 계획과 실행을 지원한 책임이 인정됐습니다.

    하지만 정호용은 생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작전지휘권은 현지 지휘부에 있었고 자신은 행정·군수 지원만 담당했다며 유혈 진압의 지휘 책임을 줄곧 부인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결과는 달랐습니다.

    정호용이 5·18 기간 4차례 광주를 찾아 약 81시간 머물렀고,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장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작전 상황을 보고받은 사실 등이 확인됐습니다.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을 앞두고 작전에 필요한 장비(섬광 수류탄 등)와 물품을 마련해 지원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5·18진상조사위는 기존 형사재판의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던 전남도청 재진입작전 희생자 7명을 추가로 확인하고, 2024년 6월 정호용 등 당시 지휘부를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습니다.

    5·18진상조사위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역 발포는 신군부 핵심 인물인 3공수여단장 최세창과 특전사령관 정호용 간의 지휘통제 관계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도 공식적·비공식적 네트워크의 실제 작동 과정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정호용은 2021년 진상조사위에 자신의 책임을 다시 조사해달라는 진정서를 냈지만,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고 책임을 회피해왔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대면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서면 답변에서도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5·18피해자와 유족에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일도 끝내 없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정호용이 13일 오전 사망했다. 사진은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연합뉴스]

    정호용은 2019년 12·12 군사반란 40주년 당일 전두환·최세창 등 군사반란 관련자들과 서울 강남의 고급 식당에서 오찬하는 모습이 포착돼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호용을 비롯해 전두환·노태우·이희성·황영시 등 신군부 핵심 세력 5명은 5·18 학살에 대한 사죄 없이 죗값을 치르지 않고 떠났습니다.

    특히 최초 발포와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의 명령자, 비공식 지휘·보고 체계, 행방불명자와 암매장 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군 기록에는 집단발포에 앞서 실탄이 지급되고 유사 시 발포명령이 내려진 내용과, 전두환이 정권 찬탈을 감추기 위해 자위권 발동을 강조한 기록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공수부대 투입 과정에 현지 지휘부와 사전 협의가 없었고, 발포 관련 보고가 공식 지휘계통에서 빠진 점 등도 비공식 지휘체계가 작동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지목돼 왔습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8차례 조사에서도 최초·집단발포의 최종 명령자를 특정할 결정적 증거까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5·18 관계자들은 핵심 당사자들이 숨졌다고 해서 진상 규명까지 끝나서는 안 된다며, 남아 있는 군 기록과 자료, 최세창·장세동 등 생존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강배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발포 지휘체계와 행방불명자 소재 등 아직 규명되지 않은 과제를 기록과 자료를 통해 끝까지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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