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반구에 위치한 남극은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반대다. 매일같이 기지에 몰아치던 눈보라는 11월이 되자 비로 바뀌는 날이 많아졌다. 기지 주변에 깊게 쌓여 있던 눈도 서서히 녹아 맨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극에 다시 여름이 찾아온 것이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에서 직선거리로 약 1.5km 떨어진, 일명 '펭귄마을'이라 불리는 171번째 남극특별보호구역도 돌아온 펭귄들로 활기를 되찾았다. 10월에 짝짓기를 마친 펭귄들은 둥지마다 두 개씩의 알을 낳고, 암수가 교대로 품어 따뜻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제 11월 말에서 12월 초면 아기 펭귄들이 차례로 부화할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며 기지 주변에서는 펭귄뿐 아니라 물범과 물개, 다양한 종류의 갈매기까지 매일같이 만날 수 있게 됐다. 기지 앞 부두에서는 고래가 바다 위로 하얀 분수 기둥을 힘차게 뿜어 올리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 38차 월동연구대는 차디찬 혹한기를 무사히 견디고, 이제 다음 39차 월동대원을 맞기 위해 다시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연구원들은 1년 동안 연구한 시료들을 한국으로 보낼 컨테이너에 하나둘 정리해 넣었다. 겨우내 우리끼리 효율을 위해 재배치해 사용하던 연구실의 비품들도 처음 모습대로 정돈하며,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갖춰갔다. 10월 말부터 11월까지는 18명 전 대원이 각자의 전문 분야뿐 아니라 기지의 공동 시설을 정비하느라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다음 차대가 사용할 유류 공급을 위해 비워진 저장고 내부를 청소하고, 기지 곳곳의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또 1년 동안 사용한 개인 물품 가운데 부피가 큰 짐들은 미리 컨테이너에 실어 한국으로 보낼 준비를 마쳤다. 하루하루가 마지막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며, 첫 월동 때처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이 이어졌다.
나는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긴 겨울 동안 원고를 써 내려갔고, 11월 17일 두 번째 에세이 『남극에서 쓴 아빠의 일기』가 출간됐다. 원고를 마지막으로 다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어머니의 병환 소식이 전해졌다.
평소 큰 병 하나 없이 지내시던 어머니가 올해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투병 끝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셨다는 이야기였다. 계속된 섬망 증세로 인해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다음 날 새벽 4시경 아들이 전화가 아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세종기지 시각은 한국보다 12시간 늦다. 느린 인터넷 탓에 한참이 지나서야 화면이 켜졌고, 그 안에는 처음 보는 백발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환자복 차림의 어머니였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면 속 낯선 어머니는 연신 "누구야?"라고 손자에게 물으셨다.
아들은 할머니가 내 얼굴을 잘 보도록 휴대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아빠예요, 할머니 아들"
그러자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영식이?"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엄마. 나 영식이야."
하지만 어머니는 '영식이'라는 이름만 되뇌일 뿐, 결국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날 새벽, 나는 전화를 끊고 방 구석에 조용히 주저앉아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책 원고의 마지막을 다시 열어, 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써 넣은 뒤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다.

세종기지에서 맥스웰 만(Maxwell Bay)을 건너면 필데스 반도(Fildes Peninsula)가 나오고, 그곳에는 러시아 벨링스하우젠 기지(Bellingshausen Station)가 있다. 기지 앞 언덕에는, 최남단에 성당으로 불리는, 아주 아름다운 목조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맡겨 놓은 연구 물품을 찾으러 러시아 기지를 방문한 날, 잠시 시간이 생겨 홀로 성당이 있는 언덕으로 올랐다. 종교는 없지만, 어머니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기도하고 방명록에 소원을 적었다.
그러나 그날, 어머니는 결국 영원히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아빠가 없는 곳에서, 열두 살 아들이 할머니의 상주가 되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쓰러져 마음껏 울고 싶었다. 아들도 없이, 외로운 병상에서 임종을 맞으신 홀어머니를 떠올리니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 소식은 기지 대장님을 통해 대원들에게 전해졌다. 정중히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대원들은 1층 식당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방을 나설 수가 없었다. 향 냄새가 나는 자리 앞에 서면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방문을 잠그고, 혼자 조용히 방에 머물렀다.
다음 날, 우리는 평소처럼 분주하게 다음 차대를 맞을 준비에 나섰다. 나는 대장님과 대원들에게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 직접 어머니를 찾아뵙고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는 제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이제 한 달 남짓한 월동 생활을 잘 정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 아들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뵐 생각이다. 남극 기지는 누군가 혼자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18명의 대원 모두가 각자 맡은 임무를 무사히 완수해야만 한다. 게다가 남극은 일반 도시처럼 정기 항공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12월에서 2월 사이 여름철에만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전세기가 운항되기 때문에, 마음먹는다고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남극생활이 두 번째인 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기사가 발행될 시점이면, 나는 이미 다음 차대에게 업무 인계를 마친 뒤일 것이다. 모든 일을 무사히 넘긴 후 공식적으로 내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순간, 가능한 항공편이 있다면 가장 빠른 일정으로 한국에 돌아가 어머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울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제38차 월동연구대 대기과학 대원으로, 연구반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처음 남극 대원으로 선발됐을 때도, 두 번째로 선발됐을 때도 많은 이들이 '대단하다'며 부러워했다. 나 역시 세종기지에 월동대원으로 두 번이나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돈을 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순간들, 날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 대기과학 대원으로서 기후 변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최전선에서 빙하를 바라보며 연구를 이어가는 삶은 분명 영광이자 평생의 자랑이다.
하지만 훌륭한 아빠, 훌륭한 아들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 곁을 지키지 못했고, 그 무거운 역할을 어린 아들에게 맡겨야 했던 못난 아들이자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월동대원들이었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해 분향소를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해 준 대장님과 대원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1년의 월동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제38차 월동연구대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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