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_아빠의 남극일기(8)]아무도 찾지 않는 남극에서 살고 있습니다

    작성 : 2025-08-09 09:00:02
    가족도, 친구도, 신선한 채소도 없는 고립의 땅, 세종기지의 겨울
    ▲기지 주변 지형탐사 중 대원들과 함께(2025.7.26)

    남위 62도, 남극반도에서 약 120km 떨어진 곳에 사우스셰틀랜드 제도(South Shetland Islands)가 있다.

    이 제도에 속한 수많은 섬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은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이다.

    대한민국의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는 바로 이 킹조지섬에 자리하고 있다.

    외부 세계에서 이곳에 닿으려면 항공기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일반 선박으로 접근하기 어려우며, 쇄빙선이 아니면 기지 근처에 도달할 수조차 없다.

    항공편은 그나마 수월한 편이지만, 겨울에는 이마저도 운항이 중단된다.

    ▲킹 조지 섬의 남극기지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는 '필데스반도(Fildes Peninsula)'에 있다.

    이 지역에는 러시아(1968년)를 시작으로 칠레(1969년), 중국(1985년) 등 여러 나라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지를 세웠다.

    반면, 우리나라는 1988년에야 기지를 건설하며 필데스반도에서 약 10km 떨어진 바톤반도(Barton Peninsula)에 세종기지를 건설하고 본격적인 남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세종기지는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바다가 얼 경우, 인근 기지들과의 왕래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유일한 육로는 '크레바스(Crevasse)'라 불리는 빙하 골짜기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설상차 - 남극기지의 주요 이동수단이다(2025.7.15)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겨울이면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어, 스노우모빌이나 설상차를 타고 바다 위를 건너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남극에서도 비교적 '따뜻한 지역'으로 꼽히는 킹조지섬은 이제 겨울철에도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는 날을 보기 힘들다.

    그 결과, 겨울철에는 고무보트가 유일한 이동 수단이지만, 강풍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커다란 유빙들로 인해 운항이 어려운 날이 계속된다.

    결국 세종기지는 예전보다 기온이 크게 올라 바다가 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5월부터 9월까지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끊긴 채 고립된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이들이 흑산도나 울릉도처럼 외딴 섬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이곳의 현실은 그런 섬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매년 9월쯤 부산항에서 선적된 식료품은 약 석 달 뒤인 12월경, 보급선을 통해 세종기지 앞바다에 도착해 대원들에게 인계된다.

    이렇게 들여온 식자재들은 창고와 냉장·냉동고에 분산 보관되어 겨울철 내내 먹거리로 사용된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직전, 마지막 항공편을 통해 가장 가까운 도시인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서 달걀, 우유, 채소 같은 신선식품이 소량 공급된다.

    하지만 열여덟 명의 대원이 외식 한 번 없이 하루 세 끼를 기지에서 해결하다 보면, 이런 신선식품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달걀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졌고, 지금은 멸균 우유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채소는 기지 내 작은 온실에서 재배한 잎채소를 조금씩 나눠 먹는 정도다.

    그 외 감자, 양배추, 파 같은 저장 채소나 과일들은 아무리 아껴 먹어도 결국 바닥이 나거나, 썩어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대한민국의 어느 섬이 이렇듯 6개월 넘게 도시로부터 식재료 공급 없이 버텨야 할까.

    무인도에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요즘 같은 시대에 한 달도 아닌 반년 넘게 보급이 끊긴 채 살아가는 곳은 남극 외엔 거의 없다.

    이런 생활을 견딘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위성인터넷을 통해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고 뉴스를 접할 수는 있다.

    하지만 느리고 불안정한 속도는 초고속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구한다.

    실제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대원들 중 일부는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곳은 남극 저기압대에 위치해 있어, 맑은 하늘을 보는 날이 손에 꼽힐 정도다.

    한 달에 한두 번쯤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야외로 나간다.

    ▲기지 주변 지형에서 눈 시료를 채집 중인 생물대원(2025.7.15) 

    연구원들은 각자의 연구를 위해 기지 주변을 누비고, 다른 대원들은 그들을 돕는다.

    현장 활동이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썰매를 들고 천연 썰매장으로 향한다.

    눈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목이 마르면 손에 눈을 쥐어 먹는다.

    그렇게 짧지만 소중한 순간 동안 고립의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다른 기지와의 교류가 끊긴 지 두 달이 넘자, 고립된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는 대원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불과 10여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다른 나라 기지의 친구들이 "놀러 오라"며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바다 위를 뒤덮은 유빙들 때문에 발이 묶인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겨울철 제약은 이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세종기지는 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하고 있는데, 눈이 많이 내리면 안테나를 덮고 있는 돔 위에 눈과 얼음이 쌓이면서 인터넷 속도마저 느려진다.

    이미 외부와 단절된 삶에 더해진 이 답답함은 대원들의 신경을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든다.

    ▲현장 연구활동 중 대원들과 함께(2025.07.15)

    매일같이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와 영상통화를 나누던 대원은, 겨울이 되자 흐릿한 화면 너머로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고, 아장아장 걷는 자녀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남극의 겨울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까지 서서히 얼어붙게 만든다.

    나도 마찬가지다. 여름철과 달리, 겨울이 시작된 이후로는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인터넷이 빠른 날이 손에 꼽힐 정도다.

    '오늘은 괜찮겠지' 하며 화면을 켜보다가, 또다시 연결 실패 메시지를 마주할 때면 미안함이 하루하루 쌓여만 간다.

    아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주 묻는다.

    "아빠, 언제 와?"

    우리는 이제 사막 한가운데서도, 태평양을 항해하는 배 안에서도 민간 위성통신망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 세종기지 역시 여름철에는 해당 통신망을 통해 비교적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부터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제한된 용량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예산 부족이라는 현실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른 분야도 아닌, 극지에서 과학기술 연구가 이뤄지는 국가 기지에조차 예산이 이토록 부족하다는 사실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시베리아에서 유럽, 아프리카까지 아들과 함께 수많은 땅을 여행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느린 인터넷에 고생한 적은 없었다.

    ▲기지 앞 유빙 - 겨울철은 커다란 유빙으로 이동이 불가능하한 날이 많다(2025.7.14)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서도 며칠만 이동하면 초고속 인터넷이 되는 호텔을 찾을 수 있었고, 광활한 시베리아에서도 하루 안에는 어김없이 신선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더 씁쓸한 건, 이곳 킹조지섬에 위치한 중국 기지나 러시아 기지, 칠레 기지에서는 초고속 인터넷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미 선진국이라 생각해온 대한민국이, 이런 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6개월 넘도록 신선한 음식 하나 구할 수 없고, 영상통화 한 번조차 마음 편히 할 수 없는 곳.

    그 남극 세종기지에서, 오늘도 열여덟 명의 월동연구대원들은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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