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말,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12살에서 15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들을 일본으로, 또 만주로 끌고 갔는데요,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지만,
힘든 일에 강제 동원된 수많은 피해자들은
보상조차 요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경원 기자입니다.
올해 84살인 오연임 할머니는 13살이던 1943년 봄, 영문도 모른 채 기차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나흘을 기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만주의 방직공장,
오 할머니는 2년 동안, 하루 12시간을
화장실도 못 가고 일했다고 말합니다.
해방 몇 달 전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고역에 시달리면서 거의 1년 동안은 다리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오 할머니는 다른 피해자들처럼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 나지 않는 사실이 너무 많아
함께 갔던 사람들과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데, 만주로 끌려갔던 근로정신대의
규모가 적다보니 이 사람들을 찾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오연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일본 도야마현의 후지코시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던 이순례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1945년 1월 당시 지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이 할머니는 일도
힘들지 않고, 중학교 공부까지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행을 택했습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설움을 주체할 수가
없지만, 10여 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
적극적으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이나 소송에 참여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싱크-이순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이것(보행기) 갖고 화장실 가고, 이것 갖고는 돌아다니고... (재판 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 나를 차에다 태워서 데려가기나 하면 모를까
일제강점기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동원됐던 피해자는 5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일부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건강 때문에, 또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때문에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그 시절의 고통을 마음에만
담아둔 채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kbc 정경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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