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_아빠의 남극일기(5)]'중국인에게 점령당한 세종기지?' 진실은 따로 있다

    작성 : 2025-05-10 09:00:01 수정 : 2025-05-10 09:21:37
    세종기지에 방문하는 특정 국가에 대한 도 넘는 비방
    남극 "모두 협력해야"
    우리나라와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 남극 킹조지섬에 약 20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있다. 올해로 벌써 38년째에 접어드는 바로 남극세종과학기지다. 세상과의 고립을 자처한 이곳에선 연구원과 기술자, 의사, 요리사 등 분야별로 선발된 월동대원들이 갖은 우여곡절 속에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길고도 짧지 않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대기과학연구원'의 일상을 이어갈 아빠의 삶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편집자주>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가 중국과 러시아에 점령당했다?'


    세종기지에서 월동하며 틈나는 대로 SNS를 통해 기지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기지를 방문한 중국과 러시아 사람들의 사진과 영상을 본 네티즌들이 어느 날 이런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극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세종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에는 한국, 러시아, 칠레, 중국,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 등 모두 8개 나라에서 상설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중 세종기지와 가장 가까운 나라는 칠레,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다.
    ◇ 칠레와의 끈끈한 협력
    ▲킹조지섬 활주로 - 칠레 공군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활주로이다

    칠레는 지리적 이점을 앞세워 남극을 자국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

    킹조지섬 유일의 활주로도 칠레 공군이 운영한다.

    동절기에 남극을 방문하는 모든 연구원과 보급품은 쇄빙선을 이용하지 않는 한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항공기를 이용해 들어온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대부분 우리가 칠레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을 일이 훨씬 많다.

    그래서 칠레 기지에서 초청이 오거나, 간혹 도움을 요청해 올 때면 우리는 항상 기꺼이 응하려 한다.

    ▲칠레와 친선 탁구 - 칠레 해군기지 대장(좌)과 세종기지 대장(우)

    반면, 칠레 대원 중에는 한류 문화의 영향으로 K-POP, 한식, K-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세종기지에 칠레 대원들을 초청해 한식을 대접하고, 문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아왔고, 그렇게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 '형님' 같은 든든한 존재 러시아
    칠레에서 항공기를 통해 이곳에 도착한 사람과 물품을 세종기지로 이송하려면, 활주로에 내린 뒤 고무보트(조디악)를 이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활주로와 세종기지 사이는 위험한 빙하지역(크레바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고무보트를 타는 장소가 바로 러시아 벨링스하우젠 기지(Bellingshausen) 해안가다.

    ▲3. 러시아 벨링스하우젠 기지 앞 해변-이곳에서 고무보트에 탑승한다

    기지에서 마중을 나온 월동대는 항상 러시아 기지 해안가에서 활주로에 도착한 연구원과 보급품이 나오길 기다린다.

    그러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면 러시아 기지 실내로 대피하기도 하고,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러시아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을 먹기도 하며,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항공기가 킹조지섬에 도착한 날, 바다 날씨가 나쁘면 세종기지에서는 러시아 기지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럴 때마다 러시아 대원들은 우리 보급품을 챙겨 안전하게 보관해 주는 일이 자주 있다.

    이처럼 칠레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역시 우리가 도움을 주는 것보다 받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럴 때마다 늦은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도 우리 요청에 항상 기꺼이 응답해 주며, 바닷가로 나와 도와주는 '든든한 형' 같은 존재가 바로 러시아 기지 대원들이다.
    ◇ 악성댓글, 그리고 중국 청년 '왕쯔'
    러시아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중국 장성기지(Great Wall)다.

    킹조지섬에서 아시아 국가는 세종기지와 중국 장성기지, 단 두 곳뿐이다.

    ▲중국 장성기지 전경-세종기지와는 바다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음식 문화와 유교적 정서가 비슷한 두 기지는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우호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하계대가 철수한 뒤, 남은 월동대원들은 세종기지와 장성기지를 오가며 운동도 함께 하고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의지한다.

    2015년 나의 첫 월동 당시, 세종기지는 시설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처진 편이었다.

    그땐 장성기지를 방문할 때마다 풍족한 음식과 잘 갖춰진 시설에 위축되기도 했다.

    중국은 자국 명절마다 주변 나라들을 모두 초청해 전통 공연과 풍성한 식사를 대접했다.

    당시엔 남미 국가들조차 중국 기지를 '킹조지섬의 큰집'처럼 여겼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세종기지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새로운 연구동 건립, 각종 시설 개선이 이어지면서, 이제 세종기지를 찾은 외국 연구자들은 감탄과 부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세종기지를 방문한 중국 정부 VIP-이제는 세종기지가 장성기지 시설보다 우수해 자주 견학을 온다

    중국 정부 인사들도 이번 하계 기간 중 네 번이나 세종기지를 방문해 시설을 둘러볼 정도였다.

    어느 날, 내 유튜브에 올라온 세종기지를 방문한 중국과 러시아 대원들의 영상을 본 사람들이 악성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도청장치 설치했을 거다. 조심해라!"
    "중국인은 간첩이다, 정보를 빼간다."
    "중국인은 찝찝해. 믿으면 안 돼!"
    "러시아랑 친하면 안 됩니다. 아군과 적군은 구분하세요!"
    "러시아는 적국 아닌가?"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걱정하는 댓글이라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온통 특정 국가를 비방하는 댓글 사이에 중국어로 적힌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바로 번역해서 읽어 보았다.

    朋友, 好久不?(친구야, 오랜만이야)
    ?的??拍的非常好 (영상이 너무 좋아요)
    我?也期待???再次相聚? (또 만나길 기대해?)

    중국어로 댓글을 단 사람은 중국 장성기지 대원중에도 나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왕쯔'란 친구였다.

    왕쯔는 20대로 아직 젊었지만 남극에 4번째 온 베테랑 요리사였고, 우리가 장성기지에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끊임없이 가져다주던 친구였다.

    그뿐만 아니라 항상 중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챙겨주고 우리를 가장 살뜰하게 챙기던 친구가 '왕쯔'였다.

    ▲중국 장성기지 방문 교류- 우측에서 4번째 있는 대원이 중국 요리사 왕쯔이다

    우릴 가장 친절하게 챙겨주던 친구가 중국인에 대한 편견 섞인 댓글이 가득한 내 영상을 본 것이다.

    다시 오기 힘든 이곳에서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 나는 틈틈이 사진을 찍고 영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걸 다른 나라 친구가 보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악성 댓글이 가득 달린 그 영상을 나에게 가장 따뜻하게 대해준 그 친구가 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한없이 밀려왔다.

    남극에서는 국적보다 '마음'이 먼저다.

    물론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므로, 국익에 반할 수 있는 보안 사고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남극조약에 따라 이곳에서는 군사 활동이나 경제 활동이 금지되어 있으며 연구시설과 생활시설은 모두 개방되어 있다.

    이는 세종기지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기지들도 마찬가지다.

    남극에서는 국가 간 정치적 긴장감보다 인간적 신뢰와 우정이 훨씬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만약 누군가 도청을 시도한다 해도, 얻어갈 정보라곤 '삼시세끼 식단'이나 '청소 당번' 같은 소소한 이야기뿐이다.

    일과 시간에는 대부분 각자 업무에 몰두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일도 드물고, 통화 역시 제한돼 있어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갈 일도 없다.

    남극의 하루는, 대화 없이 고독한 연구와 식사로 채워진다.

    각자 맡은 분야 일을 묵묵히 해내고, 쉬는 날이 되면 기지를 오가며 운동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

    그것이 남극 생활의 전부다.

    ▲유빙으로 덮힌 바다-세종기지는 겨울이 되면 고립돼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날이 많다

    킹조지섬, 특히 세종기지에서는 외부 교류가 쉽지 않다.

    다른 기지까지 거리가 멀고, 거친 남극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탓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주 큰일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 대원들을 만나는 날은 마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정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남극에서 만나는 중국과 러시아의 연구원들은, 눈보라가 세차게 치는 날 새벽에 찾아가도 늘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들이다.

    여기, 얼어붙은 땅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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