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킹조지섬에 위치한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는 단순한 연구기지가 아니다.
서울에서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 가장 외딴 곳이지만, 이곳은 우리가 체감하는 어떤 외교 무대보다 더 생생한 국제 협력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치 체제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여덟 개 나라가 이 작은 섬에 함께 머물며 살아간다.
겨울철에는 가장 가까운 문명 세계인 칠레로조차 이동이 불가능한 완전한 고립 상태에 놓인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국가와의 협력 없이는 생존조차 어려운 이곳에서, 우리는 국적보다 사람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현재 킹조지섬에는 한국을 비롯해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과 중국, 러시아, 폴란드 등 아시아와 유럽 국가까지 총 8개국이 상설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념과 역사도 제각각이다.
사회주의 국가도 있으며, 민주주의 국가지만 군부독재의 과거를 가진 나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만큼은 정치도, 이념도, 갈등도 없다.
남극조약에 따라 군사 활동과 경제 활동이 금지된 이 땅에서, 우리는 오직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다.
식량이 부족하면 서로 나누고, 의약품이나 생필품이 필요한 상황에도 아낌없이 도움을 준다.
추위로 고립된 연구자가 발생하면 따뜻한 식사를 나누고 숙소를 제공하는 일도 흔하다.
이곳에서는 협력이 곧 생존이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우정이 된다.
남극에서 한국에 대한 인기는 예상보다 훨씬 뜨겁다.
중국과 러시아 같은 인접국은 물론, 아르헨티나·우루과이·폴란드처럼 먼 거리에 있는 나라의 대원들까지 세종기지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폴란드의 아르토스키(Arctowski) 기지는 섬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거리상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극의 거센 파도를 뚫고 고무보트를 타고 왕복 세 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런데 이번 달, 폴란드 기지 측에서 "세종기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기지 대장은 "세종기지는 시설도 좋고 분위기도 따뜻하다고 들었다"며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하룻밤 머물 수 있겠느냐"고 정중히 요청했다.
바다 날씨 탓에 방문은 여러 번 미뤄졌다.
맑은 날이라도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으면 고무보트를 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며칠 전, 드물게 바람이 약하고 바다가 잔잔해진 틈을 타, 폴란드 대원들은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우리 기지를 찾아왔다.
기지를 둘러본 뒤엔 삼겹살을 함께 구워 먹으며 각자의 연구와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식사 후에는 노래방에서 K-팝을 함께 부르며 낯선 남극 땅에서 진한 우정을 쌓았다.
아르헨티나의 칼리니(Carlini) 기지도 마찬가지다.
세종기지와는 섬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으며, 이동 경로에 암초가 많아 바다가 잔잔한 날이 아니면 오가기 어렵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교류의 기회도 쉽지 않지만, 다른 기지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르헨티나 대원들은 "세종기지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라는 말과 함께, 대화는 자연스럽게 K-드라마와 오징어게임, BTS 이야기로 이어진다.
실제로 한국 이야기를 가장 자주 꺼내는 이들은 칠레 기지의 대원들이다.

킹조지섬 유일의 활주로를 운영하는 칠레 프레이(Frei) 기지는 세종기지와 연락이 가장 잦은 기지이지만, 정작 대원들이 세종기지를 직접 방문한 경험은 거의 없다.
기지 운영으로 인한 바쁜 일정도 이유지만, 고무보트를 보유하지 않고 헬리콥터 중심의 이동 수단만 갖추고 있어 왕래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칠레 대원들 중에는 "세종기지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젊은 대원들은 세종기지나 한식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저도 불닭볽음면 꼭 한번 먹어보고 싶어요", "한번만 초청해 주세요"라며 눈을 반짝인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단순히 한류 콘텐츠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짧은 한국어 문장을 연습해 건넨다는 것이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블랙핑크!"
어색하지만 정겨운 그 말들을 들을 때면, 지구 끝 남극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문화적 존재가 되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세종기지를 직접 방문하지 못한 대원들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세종기지의 영상과 사진을 찾아보며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세종기지는 이제 단순한 '차가운 연구기지'가 아니다.
이곳은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알아가고, 음식과 음악, 문화를 나누는 살아있는 교류의 장이다.
각 기지의 연구 수준은 물론, 시설과 식단, 기지 분위기에 대한 평가도 자연스럽게 오가며, 세종기지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선진화된 기지'로 주목받고 있다.
새롭게 지어진 연구동과 쾌적한 생활동,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은 외국 대원들 사이에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올해 하계 기간 동안에만 중국 정부 관계자들이 네 차례나 세종기지를 방문했고, 최근 세종기지를 찾은 폴란드 대원들 역시 "기지 시설이 너무 훌륭하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본래 임무는 대기, 우주, 지질, 생물, 해양 등 극지 과학 연구에 있다.
그러나 이곳은 동시에 '문화외교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장보고기지와 달리, 세종기지는 여러 국가와 인접해 있어 그만큼 문화와 정서를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남극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표할 수 없었다.
재외선거 등록도, 부재자 투표도 허용되지 않는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는, 그저 인터넷을 통해 뉴스만 읽으며 나라의 미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먼 땅에서 연구와 교류를 통해 국가를 알리고 있지만, 정작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은 우리에게 닿지 않았다.
정치와 외교의 경계에 놓인 이곳 남극에서, 나는 매일 '진짜 외교'를 목격한다.
그것은 회의실이나 정상회담장이 아니라 추운 바다를 함께 건너며 짐을 나르고, 국적이 달라도 웃으며 김치와 된장찌개를 나누는 일상의 풍격 속에 있다.
남극은 고립의 공간이 아니다.
세종기지는 세계로 열린 창이다.
우리나라가 지구 끝에 세운 이 작은 남극기지가, 사실은 '외교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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