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자로 한평생을 교단에서 보낸 이남근 시인이 신작시집 『엔진소리 뒤에 숨다』(시와사람刊)를 출간했습니다.
1998년 《문학21》를 통해 등단한 이후 『바람이 그림자 되어』, 『의문의 달』, 『벽 속의 그림자』에 이은 네 번째 시집입니다.
이 시인은 언어학자다운 언어에 대한 절제와 공감 능력으로 독특한 서정 시풍을 선보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언어적 함축미와 간결성 위에 형상되는 언어적 서정성은 그만의 시적 세계를 자신의 개성으로 빚어내고 있습니다.
◇ 투명한 시적 사물에 대한 매력이를 토대로 한 사유와 묘사는 아침 이슬 같은 영롱한 시적 오롯함이 작품마다 스며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가 펼친 시적 사물에 대한 매력에 쉽게 다가설 수 있게 이끌어줍니다.
꽃잎은 봄비에 젖어
너른 바닥 멀리 쓸려 나갔다
밟히고 밟힌 땅은
언제나 벌레들이 모여 있었고
눈알들이 옹기종기
집 짓는 곳
손가락 건 사랑에 피어난 꽃잎들
간밤에 봄비 내리고
뒤집어쓴 천막을 거두고
훗날을 위로하는 벅찬 슬픔에
잊어야 할 이별가 하나씩을 부르고
심장 위주로 꽃은 피고 또 피건만
앞뜰 은사시나무엔
오늘도 손님처럼 까치가 날아왔다
- 젖은 슬픔
◇ 생래적인 애수의 감정을 노래작품에서 노래한 젖은 슬픔은 생래적으로 소유한 애수의 감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봄비 맞고 피어난 꽃들이 그 빗물을 타고 "너른 바닥 멀리 쓸려 나"가는 모습은 일면 천진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칩을 지나 뛰쳐나온 개구리처럼 "밟히고 밟힌 땅"은 "언제나 벌레들이 모여 있었고" 사방 천지에 생명의 "눈알들이 옹기종기/집 짓는 곳"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봄이 되고 "손가락 건 사랑"의 힘으로 지상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납니다.
간밤에 내린 봄비로 겨우내 뒤집어쓴 천막을 거두고 '벅찬 슬픔'처럼 어우러진 대자연은 우리에게 '위로'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방에선 생명에의 환희가 다분하건만 세상에 드리운 음양의 이치 앞에서 새싹처럼 "잊어야 할 이별가 하나씩" 생각나게 합니다.
봄이 되어 얼어붙었던 지난 계절의 심장에선 소생의 맥박 소리가 교향악처럼 울려 퍼지고 "심장 위주로 꽃은 피고 또 피"어서 문득 사람을 기다리는 '앞뜰 은사시나무' 하나 서 있고 "오늘도 손님처럼 까치가 날아" 들고 있습니다.
◇ 독자의 가슴을 노크하는 아포리즘이남근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생수와 온기의 시학으로 틈새를 열고 세상을 충실히 읽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처럼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오르다 말고 / 삐거덕 문처럼 열어제쳐 주위사방을 본다"는 틈에서처럼 시인의 화법은 꽃의 미소인 것도 같고 저 하늘을 높이 나는 새들의 날갯짓이나 노래인 것도 같습니다.
"소금으로 절인 물길을 내고 / 짜디짠 기억들이 지나고 있다 / 가지마다 눈 뜬 것은 바람뿐이고 / 후회도 기쁨도 아닌 이곳 / 공놀이하던 고향이 가까이 있다"
"아무렴 지옥에나 가자 했는데 / 미라처럼 말라서 푸석거리는 기억이면 / 시간은 언제라도 저장식품을 닮았다"
"눈물이 된 순간순간들 / 지금 내 가슴은 누구보다 뜨겁다"를 노래한 넘치는 비망록에서 시인의 시적 예언이 아포리즘적으로 독자의 가슴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 채움과 비움을 통한 은밀한 시적 은유김종 시인은 평설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채움과 비움을 통해 은밀한 시적 은유로 변환해 가는 이남근 시인의 언어들은 그런 의미에서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게 하고 언어적 촉기 또한 보여준다"고 평했습니다.
전남 장흥 출신인 이 시인은 조선대를 졸업하고 전북대에서 영어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장, 대학원장, 대한언어학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미국 캔사스대(Lawrence), 일리노이대(UIUC), 캘리포니아대(Davis)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습니다.
현재 광주문인협회 회원이며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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