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한 줄도 싣지 못했던 5.18 참상

    작성 : 2014-09-01 20:50:50

    80년 5월 당시 신군부의 언론 탄압과 검열로 광주의 참상은 외부에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제작을 거부하다 해직됐던 언론인들의 증언을 통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이 34년 만에 재현됐습니다. 정경원 기잡니다.















    80년 5월, 전두환 군부는 언론 검열을 더욱 강화했고, 5.18 광주는 고립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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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경향신문 외신부 윤덕한 기자는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지만, 통신이 차단돼 현지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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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극이 절정에 달할 때도 언론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았고, 광주를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계엄사령부의 포고문만



    반복했다고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참상을 마주한 취재기자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역 일간지 전남매일신문의 18일과 19일자 지면에는 참혹한 현장이 단 한 줄도 실리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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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으로 돌아오던 사진기자마저도



    계엄군이 시민들을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때리는 현장을 취재하다 봉변을 당할 뻔



    했지만, 기자들이 직접 본 참상은 검열의 벽에 가로막혔습니다./







    분노한 기자들은 공수부대의 만행과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20일자 신문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이마저도 임원진이 조판대를 엎어버리면서 좌절됐습니다.







    결국 기자들은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공동 사직서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터뷰-박화강/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제작을 거부했던 기자 7백여 명이 강제



    해직됐습니다.







    5.18 기념재단과 80년 해직 언론인협의회는 80년 5월 당시와 그 이후 이들이 보고



    느꼈던 것과 이들에게 가해졌던 탄압,



    그리고 저항을 모아 증언집을 발간했습니다







    인터뷰-송선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







    고립된 광주의 참상을 알릴 수 없어 펜을 내려놓아야 했던 해직 언론인들,







    5월 광주를 둘러싼 언론인들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도 5.18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게 됐습니다.







    kbc 정경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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